소학(小學)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修身書).
송나라 주자(朱子)가 엮은 것이라고 씌어 있으나 실은 그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주자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것이다.
1187년(남송 순희 14)에 완성되었으며, 내편(內篇) 4권, 외편(外篇) 2권의 전 6권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았다.
명나라 진선(陳選)의 『소학집주 小學集註』 6권을 비롯하여 명·청 나라에 주석서가 많이 나왔으며, 우리 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사대부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이를 배웠다.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유학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 된다고 비유하여 『소학』이 인간교육의 바탕이 됨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내편은 입교(入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으로 되어 있다.
입교는 교육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고, 명륜은 오륜을 밝힌 것이며, 경신은 몸을 공경히 닦는 것이고, 계고는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입교·명륜·경신을 설명한 것이다.
가언은 옛 성현들의 좋은 교훈을 인용하고, 선행은 선인들의 착한 행실을 모아 입교·명륜·경신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 즉,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 등 어린아이의 처신하는 절차부터 인간의 기본 도리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소학』이 중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어릴 때부터 유교 윤리관을 체득하게 하기 위하여 아동의 수신서로서 장려되어, 사학(四學)·향교·서원·서당 등 당시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는 이를 필수 교과목으로 다루었다.
권근(權近)은 『소학』의 통달을 강조하면서 먼저 『소학』을 읽은 다음에 다른 공부를 할 것이며, 성균관에 입학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소학』의 능통 여부를 알아본 다음에 시험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은 『소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모든 학문의 입문이며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원리가 됨을 역설하였다. 그 자신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이들 이후로도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이황(李滉) 등 도학실천(道學實踐)을 중요시한 선비들이 『소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사림파들이 민중교화의 수단으로 이를 권장하였으며, 김안국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발간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우리 나라에서 간행된 『소학』이 음훈주해(音訓註解)가 미비하다 하여 명나라에 파견하는 사신에게 『집성소학 集成小學』 100권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으며, 3년 후에는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이를 인쇄, 간행하도록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사부학당(四部學堂:서울의 동부·서부·중부·남부에 설치되었던 四學의 다른 이름)의 생도들이 『소학』을 어린이가 배우는 학문으로 여겨 평소에는 잘 읽지 않고 있다가 성균관 진학 자격을 주는 승보시(陞補試)가 있게 되면 임시로 섭렵한다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그 뒤는 사부학당 생도들로 하여금 모두 『소학』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게 하되, 그 내용을 자세히 이해하여 뜻이 잘 통하는 생도만을 승보시에 응시하게 하여 뽑도록 하였다.
조선 말기인 고종 때에는 박재형(朴在馨)이 『소학』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고 거기에 우리 나라 유현(儒賢)의 도학·가언·선행 및 충신·효자·열부의 고사를 첨가하여 『해동소학 海東小學』을 편집,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유교의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배움의 내용을 강조하는 수신서로서, 성리학에 뜻을 둔 유생뿐만 아니라 민간에까지 널리 읽혀져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충효사상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관을 널리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